•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닥터 수스와 철회 문화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어느덧 두 살이 되어가는 딸이 매일 읽어달라는 책이 있다. 바로 『초록 달걀과 햄』(사진)이라는 1960년 출판된 닥터 수스 (1903∼1991)의 클래식 작품이다. ‘샘이다-나는(Sam-I-am)’이라는 긍정적인 캐릭터가 부정적인 성격의 주인공에게 ‘초록 달걀과 햄’을 먹어보라고 끈질기게 권하는 평범하고 간단한 내용이다. 오직 50개의 단어로 쓰여진 이 책은 닥터 수스 고유의 말장난과 간단하면서도 심오한 주제를 기발하고 율동적인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해 엮어나간다. 몇백 번째 반복해서 읽고 들어도 신이 나는 명작이다.   아메리카 편지 지난 반세기 동안 영어권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 중에 닥터 수스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나는 어릴 때 즐겨 읽었던 『크리스마스를 훔친 그린치』(1957)의 클라이맥스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뭉클했던 느낌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가 출판한 60여 권의 아동도서가 서양의 정신문화 토대에 기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2021년 인종차별적인 묘사를 담은 닥터 수스 책 6권의 판매 중단 결정이 발표되면서, 저자에 대한 도덕적인 평가가 논쟁의 대상이 됐다. 현재 도덕 기준에 따른 과거의 잘못으로 저명인사나 역사적 인물을 규탄하는 ‘철회 문화(cancel culture)’가 지난 몇 년간 강화된 영향이 컸다. 특히 아동도서의 경우 아직 자각적 비판 능력이 부족한 독자를 상대로 하기 때문에, 시대적 도덕성에 따라가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도 비판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작품을 시대정신을 빌미로 일괄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예술은 시대의 표상이다. 그 포폄은 궁극적으로 독자가 내려야 한다. 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 앞에 서서 사생활이 어지러운 화가의 도덕성을 떠올려야 하는 것일까. 오페라의 거장 바그너가 반유대주의자였다는 사실을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서곡을 들을 때마다 고려해야 하는 것일까.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4.04.29 00:14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죽음과 삶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캐나다는 호주·스위스·벨기에·네덜란드 등과 함께 적극적 안락사를 합법화한 소수 국가에 속한다. 적극적 안락사는 치료를 중단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소극적 안락사와 달리 약물을 투입해 직접 죽음을 돕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대부분의 유럽·북남미 국가들에서 적극적 안락사는 위법이고, 이를 도운 사람에게는 살인죄가 적용될 수 있다.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8개국 중 6개국에서는 정신질환이나 장애로 인한 고통도 자격 요건으로 인정한다. 특히 1942년 안락사를 최초로 허용한 네덜란드는 매년 수십 명에서 100명 정도의 정신질환 환자들이 안락사로 죽음을 맞이한다. 대부분 몇 차례의 자살시도에 실패한 경우가 많아 불치병으로 죽음을 앞둔 환자와 비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신질환자들이 치료를 제대로 받는 경우가 드물어 그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아메리카 편지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안락사(euthanasia)라는 용어는 말 그대로 좋은(eu) 죽음(thanatos)이라는 뜻이지만, 그 본래 의미는 자연적인 죽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의하면 그 어느 종류의 안락사도 엄격히 금지된다.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사망률이 높았던 터라 삶의 가치가 그만큼 소중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육체적 절정기에 다다른 젊은이가 전사한 경우는 ‘아름다운 죽음(beautiful death)’이라 하여 신들의 사랑을 받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영원히 기억된다고 여겼다. 죽음을 알면서 맞이한 아킬레우스(사진)의 비장함이나, 영광을 내려달라는 어머니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헤라 여신이 선사한 죽음을 맞는 효자 쌍둥이 클레오비스와 비톤의 이야기는 신화를 통해 죽음의 격을 높인 그리스 문화의 일면이다. 이는 죽음을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필연적 죽음 앞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4.04.22 00:24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화성 이주 프로젝트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스페이스X를 이끄는 세계 제일 갑부 일론 머스크의 며칠 전 연설에서 그의 화성 이주 프로젝트 꿈이 실현될 가능성이 그럴듯하게 다가왔다. 정말 2029년에 화성에 사람을 보내고 2050년까지 100만명을 이주시킬 수 있을까. 물론 믿기 힘들다. 하지만 화성을 인류의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그의 꿈을 무모한 망상이라고 웃어넘길 수만은 없다. 2002년 설립한 민간 우주항공 기업 스페이스X는 그동안 세웠던 목표들을 대부분 달성했다. 재사용 발사체를 이용해 로켓 발사하는 비용을 10분의 1로 줄이는 데 성공했고, 200t의 화물과 100여명의 탑승객을 운송할 수 있는 세계 최대의 우주선 ‘스타십’이 세 번째 시행에서 우주 진입에 성공했다. 우리는 ‘모국’인 지구를 버리고 그 열악한 환경의 화성으로 과연 누가 자원해 갈 것인가에 궁금해한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로의 탐험은 항시 인류에게 엄청나게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김지윤 기자 식민지 개척의 개념은 그 원천이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의 경우 벌써 기원전 3000년경 가나안 지역으로 이주했다. BC 1000년경 페니키아 문명이 아프리카 북해안과 스페인 남단으로 널리 퍼졌고, 바로 이어서 고대 그리스의 대규모 식민지 개척 사업이 300년 사이에 지중해와 흑해를 둘러싼 지역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이 중 잘 알려진 지역은 바로 마그나 그라키아(Magna Graecia)라 불리는 이탈리아 남단과 시실리다. 아테네 못지않게 피타고라스나 아르키메데스 같은 유명한 인물들을 배출하고 활기찬 문화와 지적 배경을 자랑했다. 가문의 땅을 물려받는 장남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도시국가의 사람들은 배를 타고 식민지로 향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 와중에 수많은 이들이 익사했다. 미지를 탐험하려는 인간의 본능이 아니고서는 그 많은 사람이 죽음을 무릅쓰고 위험한 바다를 항해하며 가족과 모국을 떠났을까.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4.04.15 00:14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금강역사와 헤라클레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석굴암 주실 입구의 좌우를 지키고 있는 금강역사상은 동양적인 감각을 띤 보살상들과는 달리 우락부락한 모습에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는 수호신이다. 산스크리트어로 ‘바즈라파니(vajrapani)’인 금강역사는 번개, 혹은 금강저(vajra)를 손에 쥔 자라는 뜻이다. 초기 대승불교에 등장하는 이 보살은 육체적인 강인함을 부각하고 악을 쫓아내는 무서운 모습이 특징이다. 그러기에 2000년 전 파키스탄을 중심으로 발달한 간다라 불교미술의 유적에서 보이는 바즈라파니상이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 모습을 차용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가 갈 만하다. 간다라 미술의 바즈라파니는 가끔 헤라클레스처럼 사자 가죽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몽둥이를 든, 그리고 육체미를 자랑하는 나신으로 석가모니를 동반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힘이 센 남성상인 헤라클레스는 맨손으로 죽인 불멸의 네메아 사자를 갑옷으로 삼고 아폴로 신과의 대결에서도 지지 않는다. 반인반신 영웅인 헤라클레스는 신과 인간의 사이를 연결하는 보살과 관념적으로도 상통한다.   아메리카 편지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간다라 불교미술을 매개로 헤라클레스 모티브가 중국 당나라까지 전파됐다는 사실이다.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발굴된 당삼채 도기상 중에도 영락없이 헤라클레스 모습을 한 전사가 보인다(사진). 그리고 이는 청나라 어린이들이 즐겨 쓰던 ‘호랑이 모자’까지 이어진다는 설도 있다. 그렇다고 중국 민속 문화의 한 양상이 서양 고전 문화에 그 유래를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간다라 미술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우세한 문화가 열세한 문화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견해다. 초기 불교는 그 당시 공존했던 서양문화뿐 아니라 힌두교나 자이나교의 요소들을 전략적으로 흡수했고, 동방으로 전파되면서 유교·도교·신토이즘 등의 토착신앙과 결합하며 발전한 것이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4.04.08 00:24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부활절 달걀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해마다 부활절이 돌아오면 어린 시절에 갖가지 색깔로 물들인 달걀 찾기를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이제 두 살이 되어가는 딸아이가 삶은 달걀 까는 일을 특별히 좋아하기에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달걀 물들이기 장식을 해보았다.   달걀은 오래전부터 다산과 재생을 상징했다. 성탄절이 동짓날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부활절은 봄의 재생을 기념하는 이교도 관습과 융합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영어권에서 사용하는 ‘이스터(Easter)’라는 용어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명칭은 서게르만족이 숭배하던 봄의 여신 에오스트레(Eostre)에서 유래된 것이다. 더 나아가 고대 그리스의 새벽의 여신 에오스(Eos)와도 관련이 있다. 동쪽(East)에서 뜨는 태양의 신 헬리오스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는 에오스는 밤과 낮의 중간을 맡아 그 경계를 정의한다. 겨울을 지낸 뒤 만물이 재생하는 봄이나 캄캄한 밤을 이기고 동이 트는 새벽은 둘 다 생명의 힘을 상징한다.   아메리카 편지 수메르의 이슈타르(Ishtar)도 풍요와 다산의 여신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비너스다. 흥미롭게도 이슈타르를 기념하는 봄의 페스티발은 그가 저승으로 연인을 구하러 갔다가 이승으로 돌아오는 ‘부활’을 상징한다. 고대 그리스의 페르세포네도 저승으로 납치되었다가 풀려난다는 이야기로 봄을 설명한다.   하지만 달걀이라 하면 무엇보다도 디오니소스 신을 최고로 숭배하는 오르페우스교에서 만물의 태고의 원천으로 언급하는 ‘우주 달걀(cosmic egg)’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달걀을 까고 나오는 비옥하고 신비스러운 존재라는 관념은 고대 그리스를 비롯해 힌두교, 조로아스터교나 이집트와 페니키아 문명에서 볼 수 있다. 이는 물론 우리나라 주몽의 탄생 같은 고대의 난생 설화와도 관련이 있다. 주역은 부활을 복괘(復卦)로 말한다. 복(復)은 ‘돌아온다’는 뜻이다. 부활 그 자체가 생명의 순환이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4.04.01 00:38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공화정 정신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지난주 역대 최고 득표율인 87%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대선 선거 승리가 공식 승인됐다. 서양 각종 매체에서는 이번 러시아 대선을 ‘조작 선거’라 규정하고 주민 검열, 강제 투표, 그리고 투표 조작을 언급하며 맹비난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푸틴 정권은 그에 대항해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인물들을 투옥하고 추방해 체계적으로 견제했다. 푸틴과 함께 대선 출마한 후보 세 명의 득표율이 4% 이하라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아메리카 편지 서양 민주주의의 근원이라 하면 직접 민주주의를 채택한 고대 그리스를 흔히 생각하지만, 500년 역사의 고대 로마 공화정(BC 509∼27) 또한 현대 민주주의 체제와 공통점이 많다. 최고 관직인 집정관은 오늘날의 대통령과 비슷한 권한을 갖지만, 해마다 두 명의 집정관이 선출돼 상대방의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집정관 후보는 원로원에서 지명했고, 대중 집회에서 투표를 통해 결정됐다.   로마의 원로원은 그야말로 오랜 역사와 지구력을 과시한 정치기구다. 300∼600명의 원로로 구성된 이 의회는 실질적으로 사회·정치 전반의 결정권을 장악한 통치 기구로, 한사람이 세력을 결정적으로 장악할 수 없도록 로마 공화정의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물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와 정권을 장악하기 전까지의 상황이다.   로마의 첫 독재자는 결국 공화정을 되찾고자 하는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23번의 칼 찔림을 당하고 죽음을 맞이했지만, 로마제국의 미래는 돌이킬 수 없었다. 카이사르의 말 그대로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던 것이다. 건강하지 못한 황제 권력과 기독교의 신권이 결합하면서 절대권력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그나마 한국의 선거제도는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 로마 공화정의 건강한 측면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4.03.25 00:35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푸른 하늘 은하수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매일 밤 아기 딸을 재우면서 ‘반달’이라는 1920년대에 작곡된 한글 동요를 부른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쎄쎄쎄’ 놀이하던 기억이 아른거리기도 하고, 광활한 은하수 바다에 홀로 둥둥 떠 있는 자그마한 쪽배를 토론토 야경 위에 떠올리는 것도 운치가 있다. ‘서쪽 나라’가 광복을 향한 희망을 나타낸다고 생각되어 더욱 소중한 마음으로 아기에게 불러준다.   아메리카 편지 고대인들은 공해가 없어서 은하수를 더욱 생생하게 느꼈을 것이다. 우리의 전래동화는 견우와 직녀의 로맨스를 소재로 7월 칠석날에 까치가 만든 오작교라고 은하수를 설명한다. 재회할 때 기쁨의 눈물이 보슬비로 내린다고 전한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베트남에도 견우직녀에 상응하는 전설이 있다. 흥미롭게도 핀란드-우그르 계열의 전설에서도 그와 비슷한 요소가 발견된다. 은하수를 ‘새들의 경로’(핀란드어로 ‘Linnunrata’)라 부르는 것. 철새들의 이주를 도와주는 하늘의 딸 린두 여신이 북극성과 사랑에 빠져 그가 변심해 떠났을 때 흘린 눈물이 은하수가 되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는 헤라클레스가 아기 시절에 헤라 여신의 젖을 먹다가 깨무는 바람에 놀란 여신이 그를 뿌리쳤을 때 우유가 하늘에 뿌려져서 은하수가 생겼다고 한다. 라틴어로 ‘우유의 길(via lactea)’은 말 그대로 ‘밀키웨이(Milky Way)’의 어원이 되었다. 또 그리스어 갈락시아스, 즉 밀키웨이는 천문학 용어로 채택되어 은하(Galaxy)를 지칭하게 되었다.   철새들이 별빛을 이용해 이동한다는 사실은 오늘날에 와서야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지만, 고대인들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 사회에서 우리의 물리적 환경에 대해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다. 심지어 우리 은하의 구조 자체에 대한 이론도 끊임없이 바뀌고 있다. 자연의 신비로움을 신화로 승격해 이해했던 고대인들의 지혜는 아름다운 인간의 속성이라 할 것이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4.03.18 00:14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참주의 실상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지난주 15개 주 경선 ‘수퍼 화요일’을 하루 앞두고 미국 연방 대법원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 자격을 승인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압승을 거둔 트럼프는 올해 11월 대선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4년 만에 맞붙는다. 수많은 미국인이 이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무기력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서양 민주주의 국가의 전형인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고대시대 과두제에 못지않은 편협한 정치적 판도가 펼쳐지고 있다. 루스벨트나 케네디 같은 역사적인 가문들은 늘 존재했다지만 최근 조지 부시 대통령 부자나 클린턴 내외, 공화당 후보로 다시 뽑힌 트럼프 등을 보면 미국 ‘지배층’도 뻔한 서클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메리카 편지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발상지다. 그러나 BC 507년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이전에는 독재 체제 폴리스였다. BC 7세기에서 6세기로 접어들면서 귀족정 체제에서 벗어나 참주정 독재 체제의 길을 갔다. ‘참주(tyrannos)’라는 용어의 원래 뜻은 위헌적으로 정권을 잡거나 그러한 자리를 물려받은 시민을 일컫는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BC 6세기 중반 쿠데타로 참주가 된 페이시스트라토스다. 그는 평등주의적 정책으로 빈곤층의 지지를 샀고, 귀족들의 파벌 싸움으로 혼란한 아테네를 BC 561년 단숨에 장악했다. 5년 뒤 파벌들이 힘을 합쳐 그를 몰아냈지만, 파벌들 사이의 동맹이 깨지면서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다시 돌아올 기회가 생긴다. 이때 민심을 다시 사기 위해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짜낸 꾀가 유명하다. 키가 6척이나 되는 ‘푸에’라는 여인을 동원해 아테나 여신처럼 차려입히고 함께 마차를 타고 아크로폴리스로 갔다고 한다. 아테나 여신이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손수 데리고 온다는 소문을 미리 퍼뜨려 놓은 터라 아테네 시민들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왠지 현재 미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4.03.11 00:24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나발니와 소크라테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러시아 대통령 선거를 한 달 앞두고 푸틴 정권의 반정부 리더인 알렉세이 나발니가 2월 16일 갑작스럽게 옥사했다. 지난 20년 동안 반정부 활동을 했던 나발니는 시장 및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 할 때마다 체포되거나 출마 자격을 박탈당했고, 결국 2020년 8월 모스크바행 비행기 안에서 독살될 뻔했다. 당시 베를린의 병원으로 이송됐던 나발니는 체포 및 암살 등의 위험을 뻔히 예상하면서도 치료를 마치자마자 제 발로 귀국했다. 자신은 서유럽에서 편히 살면서 러시아 국민에게 푸틴 정권에 대항해 싸우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메리카 편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 역시 정치적인 이유로 고소돼 “청년을 부패시키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명으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가 도주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악법도 법이다”는 신조로 사약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비롯해 기원전 5세기 말의 격동기를 거친 아테네는 친스파르타의 과두제인 30인 정권하에 있었다. 이들은 공포정치를 통해 대립 세력을 숙청했다. 1년 만에 민주정권이 복귀되면서 30인 정권에 관여한 이들 중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문제시됐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이 잘못됐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당시 지혜롭다고 명성을 얻은 모든 사람과 공개토론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지배층의 미움을 샀다.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자각’을 통해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현인들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몰랐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근원적 물음이다. 나발니나, 소크라테스나 자기가 소속한 체제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졌다. 우리의 정치도 이러한 물음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4.03.04 00:14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총기와 민주주의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얼마전 미국 캔자스시티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날 조지아주 고등학교에서도 총격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또다시 미국에서는 총기소지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일반인 총기 보유 비율로 미국을 따라가는 나라가 없다. 일반인 100명당 120개 이상의 총기가 나돌고 있다. 사람 수보다 총기가 많은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 캐나다는 일반인 100명당 35개, 프랑스는 20개의 총기를 소지하고 있다.   그와 비례해 일반인 총기 사망률도 선진국 중에서 미국을 따라가는 나라가 없다. 캐나다보다 8배가 높고, 영국의 340배가 된다. 2021년 통계에 의하면 총기로 사망한 사람 수가 35개 주에서 교통 사고로 죽은 사람 수를 능가할 정도다.   아메리카 편지 총기법 강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미국은 총기 규제를 못 하고 있는 것일까. 공화당이 총기 소유권을 지지하고 있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큰 전미총기협회(NRA)가 규제 반대 로비를 계속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 특유의 역사적·사상적 배경에 있다. 총을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권리는 바로 미국의 근간이 된 헌법에 명시돼있다. 특히 1791년에 쓰인 수정헌법 제2조는 자유 국가의 안보를 위해 “국민이 무기를 보유하고 소지할 권리는 침해되어선 안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물론 개척시대 사고방식(frontier mentality)의 산물로 21세기 미국의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황량한 벌판을 배경으로 하는 서부영화가 말해주듯 미국의 민주주의는 내 목숨은 내가 지킨다고 하는 개인주의, 다시 말해 공동체 도덕이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환경에서 성장한 것이다. 총기를 불법화하면 오직 불법자들만이 총기를 소유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생각할 때 유교를 바탕으로 한 우리나라의 도덕질서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4.02.26 00:24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체육과 컬트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축구 아시안컵 대회가 요란스럽게 마무리됐다. 준결승전에서 요르단에 패함으로써 64년 만에 아시아 정상에 다시 오르리란 꿈은 꺾였다. 경기를 보며 2002년 한일월드컵 때 한국이 갑자기 국제 무대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기억이 났다. 그동안 한국은 축구 강대국으로 발전해 이번에 요르단에 진 것도 말이 안 되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다. 전략 부재 문제가 제기됐던 클리스만 감독에게는 끝내 경질 결정이 내려졌다.   미국에서는 올림픽 경기 메달리스트라도 ‘15분간의 명성’과 몇만 불의 포상금 외에는 별다른 혜택이 없다. 하지만 미식축구·농구 등의 프로 스포츠 스타들은 영웅 대접을 톡톡히 받는다. 이러한 현상은 고대 그리스의 스포츠 영웅문화에서 직접 유래한 것이다.   아메리카 편지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영웅이라 하면 신화나 서사시에 등장하는 헤라클레스며 아킬레우스와 같은 인물들을 떠올린다. 실제로 살았던 역사적인 인물들을 기념하는 관습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로마시대와는 달리 그리스에서는 정치가도 전쟁 영웅도 공식적인 동상을 세우고 추모하지 않았다. 하지만 운동선수들은 예외였다. 4대 경기(올림픽, 네메안, 피티안, 이스미안)에서 승리해 그 도시국가에 영광을 가져오는 선수는 말 그대로 영웅이 되어 곳곳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고, 올림픽 경기 승리자는 평생 정부에서 밥을 먹여주고 모든 극장의 앞자리에 앉을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다.   고대 그리스 예술의 이데아를 이루는, 그리고 모든 서양 미술사의 근본을 이루는 누드 남성상도 바로 운동선수를 나타내는 동상(사진)이다. 물론 이러한 체육에 대한 컬트는 이상적 군인을 양성한다는 의미가 강했지만, 몸을 단련하고 그 몸의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관습이 서양문화의 미의 바탕이 되었다. 아름다움과 건강은 하나가 돼야 한다는 측면에서, 현대인의 건강문제와 관련해 깊게 생각해볼 만한 주제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4.02.19 00:19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우리와 남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현재 미국 남부 국경에서 위기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폭증하는 불법 입국 난민들을 더 이상 보고만 있지 못하겠다며 텍사스 주 정부 단독으로 올해 1월 25일 국경 봉쇄 작전을 결정했다. 주 정부가 국경에 철조망과 장벽을 설치하고, 주 방위군을 동원해 단속에 직접 나선 것이다. 연방정부는 이에 대해 대법원을 동원해 장벽 철거를 지시했고, 텍사스 주는 국경 도시 이글 패스의 공원을 무력으로 장악해 국토안보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어처구니없는 교착 상태에 이르렀다. 미국의 국경 정책은 다가오는 대선의 최대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오는 불법 이민자는 하루 1만 명 이상에 달한다.   아메리카 편지 인류의 긴 역사를 볼 때 한 사회 공동체가 ‘남’을 대하는 태도는 항상 갈등의 소지를 지녀왔다. 외국인을 대하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태도를 보면 기원전 5세기 전반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전후로 그 어조가 바뀐다. 도시국가 간에도 항시 무력충돌은 있었지만 공통적인 언어·문화·종교를 통해 그리스인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했다. BC 5세기에 들어 역사상 처음으로 페르시아 대국에 대항해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힘을 모아 싸워야 했고, 그 후 타국인을 칭하는 용어 ‘바르바로스’가 더더욱 부정적인 의미를 띠게 되었다.   비교적 국수주의적인 고대 그리스에 비해 로마 제국의 이민 정책은 흥미롭게도 진보적이었다. 노예를 제외하고는 모든 남녀노소가 로마 시민권을 가질 자격이 있었으며, 그 조건은 본토의 관습을 버리고 로마의 언어·문화·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예도 일정 기간의 노역 이후 자유민이 되어 로마 시민이 되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러한 전략적인 문화 동화 정책은 방대한 영토의 제국을 유지하는데 한몫을 했다. 그러나 그 역효과가 제국의 멸망을 초래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역사는 하나의 관점에서 보기 힘든 그 무엇이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4.02.05 00:14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비즐리의 혁명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이번 학기에는 토론토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에서 대학원생들을 상대로 고대 그리스 도기화에 관한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사진). 그리스 미술이라 하면 우리는 보통 서양미술의 근본을 이루고 르네상스 조각상의 모형이 된 인체조각상들을 떠올린다. 혹은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완벽한 비율로 미의 극치를 담았다고 하는 건축물들을 생각한다. 하지만 2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에게 가장 많은 양으로 전해 내려온 그리스 예술품은 바로 도기화다. 현재까지 20만점 이상의 도기화가 발굴돼 전 세계 박물관 등에 소장돼 있다. 도기들이 무덤에 시신과 함께 매장됐기에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보존된 것이다. 도기화는 글로 전해지지 않는 수많은 신화와 일상 생활의 단편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오랫 동안 일상 공예품 취급을 당하며 무시를 당했었다.   아메리카 편지 이런 관습을 완전해 깨버린 건 옥스포드 대학 교수였던 고고학자 존 비즐리 경(1885∼1970)이 필생의 사업으로 삼았던 도기 화가에 대한 연구였다. 그는 독창적인 발상으로 그리스 도기화를 흔해 빠진 일상용품에서 르네상스 유화 못지않은 대가들의 예술품으로 변신시켰다. 그리스 도기 화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자랑스럽게 서명을 하는 관습이 있었다. 비즐리 경 이전에는 그 이름은 단순한 기술자 표시였다. 40여 개 이름으로 서명된 수백 개 작품의 연구를 시발점으로 하여 비즐리 경은 거의 1000명의 아티스트를 필체로 식별했다. 그 결과 제자, 선생, 동료, 그리고 도기소들간의 복잡한 관계가 드러났고, 고대 그리스 예술품 제조업은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아틀리에 못지않게 개성으로 가득한 활기 넘치는 무대가 되었다. 서양 문화를 구성한 화가들의 개성주의가 이토록 고대 사회의 깊은 구조를 밝혀준 것을 생각할 때 일본으로 끌려간 우리나라의 수많은 무명의 장인들이 떠올라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4.01.29 00:18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자부심과 자격지심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지난 주말 수잔 윤이라고 하는 내 토론토 친구의 수필이 뉴욕타임스(NYT)에 실렸다. 최근 어린이책 작가로 데뷔한 수잔은 지난여름 25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고, 그 경험을 담은 수필이  NYT 칼럼으로 발탁됐다. 친구의 칼럼을 읽으며 나는 서양에서 우리나라를 바라보는 시선이 지난 20여 년 동안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새삼 느꼈다. “니하오”나 “곤니치와”로 관심을 끌려 했던 길거리 상인들이 요즘엔 완벽한 발음의 “안녕하세요”로 말을 건다. 서양의 10대들이 K팝 광팬이 돼 한국어 학원에 다닌다는 말도 흔히 듣는다. 토론토 대학의 한국어 수업도 대기자 명단이 길어 들어가기 힘들다는 불평이 다반사다. “눈 떠보니 선진국”이라는 말 그대로다.   아메리카 편지 그런 반면, 한국에 사는 미국인 수필가 콜린 마셜이 2020년 뉴요커 월간지의 코로나 관련 기사에서 언급했던 한국인들의 자격지심도 엄연히 실존한다. 마셜은 “효율적인 코로나 대처 방안으로 유명한 한국에서 아직도 상당수 국민이 한국이 후진국이란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그 이유 중 하나로 일제 강점의 후유증을 꼽았다. 식민지 근성이 아직 남아 있다는 분석이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관계에서 배울 것이 많다. 로마제국이 그리스 영토를 모두 점령하고 식민지로 만들어 통치했지만, 그리스 문화의 ‘우월함’은 로마인들도 인정했다. 로마인들은 학문적인 글은 라틴어보다 그리스어로 쓰는 것을 선호했고, 그리스 미술 작품들은 수많은 복사본을 만들어 수집했다. 심지어 그리스인을 노예로 들여 철학 선생님으로 삼는 일이 보통이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리스인들은 열등의식은커녕 자기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량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되고, 과대평가해서도 안 된다. 정확한 실상을 세계사적 안목 속에서 파악하고 창조적 전진을 계속해야 한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4.01.22 00:17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문화재 반환과 말콤 벨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며칠 전 내 휴대폰으로 문자가 왔다. 내가 학위과정을 하고 있던 시절 시칠리아에서 고고학 발굴작업을 할 때 아르바이트하던 안젤로로부터였다. 그는 시칠리아의 카타니아 대학에서 고고학 공부를 마친 뒤 프란치스코 수도승이 된 특이한 경력을 소유한 청년이었는데, 가끔 소식을 주고받았다. 느닷없이 그가 보낸 문자는 시칠리아 발굴작업의 디렉터였던 말콤 벨 (Malcolm Bell Ⅲ) 교수가 로마에 거주하는 동안 갑자기 독감에 걸려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소식을 제일 처음으로 들은 것이 학교 동료가 아닌 안젤로를 통해서라는 사실은, 말콤 벨 교수가 고고학 발굴 작업을 진행하면서 지역 사회와 구성원들에게 끼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안젤로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뵙지 못하고 로마를 떠난 것을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   아메리카 편지 말콤 벨 교수는 나에게는 불멸의 은인이다. 내가 천체물리학 박사를 마치고 미술사 공부를 새롭게 하고 싶어 버지니아 대학 석사과정에 들어갔을 때, 호메로스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나를 믿어 주고 이끌어 주셨다. 또 고고학 발굴작업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해 주신 분이었다.   평생 그는 고고학 유물의 불법거래에 맞서 싸웠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중요한 문화재들을 출토 국가에 반환하자는 캠페인을 일찍부터 하셨다. 그의 노력으로 미국 LA의 게티 미술관에서 불법으로 획득한 대규모 아프로디테 신상(사진)이 원래 자리인 시칠리아의 자그마한 마을로 반환된 것은 참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10여 년이 지난 현재, 세계 곳곳의 최정상급 박물관들이 소장품들의 법적 소유권을 재검토하고 출토 국가로 반환하는 경우가 느는 추세는 말콤 벨 교수가 일생을 투쟁한 과업의 유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위대한 우리 역사 유물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인 연구와 이해와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4.01.15 00:16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캐나다의 어두운 역사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캐나다에 와서 ‘토지 인정(Land Acknowledgement)’이란 걸 처음 접했다. 공공행사를 시작하면서 읽는 선언문 같은 것인데, 그 내용은 이렇다. “우리는 지금 몇천년 역사의 이러이러한 선주민 종족 땅에 서 있다.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며, 이 땅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을 감사히 여긴다.”   캐니다에는 원주민(퍼스트네이션) 찬양기념물이 도처에 세워져 있고, 정부 기관인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설립돼 원주민의 역사를 공적으로 인정한다. 원주민에 대한 혜택도 여럿이다. 원주민 문화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문양도 법적으로 보호되어 원주민 출신이 아닌 아티스트는 쓰지 못한다. 왜 이렇게 퍼스트네이션을 찬양하는지 처음에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메리카 편지 그런데 2022년 여름 프란치스코 교황이 캐나다를 방문해 카톨릭교회가 위탁운영한 원주민 기숙학교에 대해 공식 사과를 했다. 19세기 말부터 약 150년간 정부에서 운영했던 139개의 원주민 기숙학교는 ‘미개한’ 원주민을 백인 문화와 사회에 동화시킨다는 구실로, 약 15만 명의 어린이들을 가족들로부터 강제로 빼앗아 수용하고 언어와 문화를 말살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혀에 바늘을 꽂는 참혹한 처벌과 성폭행 등의 행위도 일삼았다. 기숙학교에서 질병·학대·방치로 인해 죽은 원주민 아동 숫자가 지금까지 4000여 명이 확인됐다. 이는 원주민 학대 역사의 일부에 불과하다.   캐나다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뒤늦게라도 반성하고 보상하려는 것인데, 기숙학교의 원형모델을 제공한 미국은 보상은커녕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도 없다. 근래의 BLM(Black Lives Matter) 운동만 봐도 알 수 있듯 미국의 인종차별 이슈는 노예제도의 후유증으로 인해 흑인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앞으로 캐나다를 본보기로 삼아 원주민 학대 역사를 인정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행할지, 아니면 지금처럼 계속 뒷전으로 미룰지 궁금하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4.01.08 00:22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시간과 창조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고대사회에서는 경작을 시작하는 봄, 즉 3월이 새해였다. 만물이 소생하는 시기를 새해로 본 것이다. 그러다가 고대 로마의 두 번째 왕인 누마가 기원전 8세기 말에 시작을 상징하는 야누스신의 이름을 본떠 부른 1월로 새해가 변경된다. BC 46년에는 천문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양력 역법인 율리우스력이 처음으로 채택됐고, 365일의 기간(4년마다 한 번씩은 366일) 동안 매년 돌아오는 1월 1일이 새해로 선정됐다.   1582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율리우스력을 살짝 개정해 좀 더 정확하게 천체 움직임을 따르는 그레고리력을 만들었다. 이 역법이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다.   아메리카 편지 회귀년을 이용해 1년 평균 길이가 정수로 떨어지지 않는 점을 보완하는 양력 시스템이 2000년이라는 세월 동안 변치 않고 성공적으로 적용됐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특히 율리우스력 이전의 복잡하고 다양하게 공존하는 달력 시스템들을 돌이켜보면 율리우스력의 성공은 경이롭다. 농경·정치·종교·사회 등 다양한 용도에 따라 다른 음·양력 달력을 채택한 고대 그리스의 경우를 살펴보면, 시간을 체계화하는 과정은 결코 과학적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계몽주의의 후손으로 과학적 시각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가치평가가 없는 물리적인 대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인류의 정치적 역사는 시간 정복의 역사다. 달력을 개정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정복된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이용해 거대한 해시계를 로마 도시 한복판에 만든 그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는 시간 자체를 정치적으로 종속시켜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획일적으로 빚어갔다. 『노자도덕경』에도 “돌아오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는 말이 있다. 돌아옴은 결코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돌아옴 속에서 새로운 창조를 한다. 시간의 노예가 되지 말고 주체적으로 시간을 창조해 나가는 역사가 새해에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김승중 고고학자 토론토대 교수

    2024.01.01 02:27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광화문 월대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최근 광화문 앞 월대가 복원됐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광화문 월대는 2045년까지 진행될 경복궁 복원계획 중 하나로 “경복궁의 중심축, 즉 척추뼈를 완성하는 마침표”라고 한다. 월대가 대체 무엇이기에 오랫동안 교통 불편을 끼치면서도 복원해야만 했을까. 관리들이 말을 타고 출입하는 곳, 중국 사신을 처음으로 맞이하는 곳, 백성과 정부가 교차하는 곳 등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이렇듯 복합 건축물의 의미는 흔히 총체적인 구조와 디테일의 관계에서 생성된다. 고대 로마 유적 중 아우구스투스의 포럼(사진)이 대표적인 경우다.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역사의 방향을 원로원이 이끄는 공화국에서 중앙집권인 황제 체제로 영원히 바꾸었다. 그는 시대를 읽었다. 미술의 힘을 빌려 매우 효율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몇십 년에 걸친 내전을 겪고 로마의 평화를 되찾은 아우구스투스는 자기 치세의 자신감을 드러내는 수많은 건축 기념물을 세웠다.   아메리카 편지 아우구스투스는 건축의 황금기를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서 찾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고대 그리스의 이상적 건축양식과 조각상의 스타일을 본떠 자기 특유의 클래식 리바이벌을 이룩했다. 그의 스타일은 15세기의 르네상스와 19세기 신고전주의의 원형이 되었다. 겉으로는 파르테논 신전처럼 보이지만 안에 들어서는 순간 로마 시대의 특징적인 돔 설계의 판테온 같은 건물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포럼은 일반 시민을 위해 지어진 공공장소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로마 원로원을 견제한다는 의미를 담아냈다.   우리가 고생스럽게 고궁의 원형을 복원하는 작업은 일제강점기의 구부러진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 원형에 담긴 상징체계를 우리의 현재의 삶의 의미로 창조해낸다는 뜻을 품고 있다. 역사는 영원히 현대사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3.12.25 00:22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성탄절의 유래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면서 아기 예수가 탄생한 날을 되새긴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예수라는 역사적인 인물의 실제 탄생일은 아무도 모른다. 지난 3세기부터 지금까지 논쟁이 뜨겁다. 성경에 나오는 역사적 사건, 천문학 지식, 또 계절 관계 등을 분석·추론하며 다양한 학설이 제기되었다. 무엇보다 12월 25일은 아니라는 사실 외에는 공통된 의견이 없다. 그러면 왜 이날이 성탄절로 정해진 것일까.   아메리카 편지 성탄절이 처음 공식적으로 12월 25일로 채택된 때는 354년이다. 그러나 이미 3세기 전반에 로마의 히폴리투스라는 신학자가 예수 탄생일을 겨울로 추정한 기록이 있다. 많은 역사학자의 연구 결과 성탄절은 로마의 ‘사투르날리아(Saturnalia’)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농업의 신이며 주피터의 아버지인 사투르누스를 기념하는 축제다. 일주일 간 온 도시가 잔치를 벌이고 선물을 주고받았다. 음주와 포식은 물론 평소 금지됐던 도박도 허용했다.   역으로 주인이 노예에게 상을 차려주며, 노예가 주인에게 버릇없는 행동을 해도 벌 받지 않았다. 축제 기간 계급과 관계없이 누구나 동등한 취급을 받았다. 썰매를 끄는 사슴인 ‘루돌프’를 노래하는 크리스마스 캐럴도 사투르날리아 축제에 관련한 루돌푸스라는 노예의 라틴어 노래에서 유래한다.   농경과 부를 관할하는 사투르누스는 시간의 아버지다. 동짓날 즈음인 사투르날리아는 해가 점점 길어지는 것을 기념하는 빛의 축제이기도 했다. 12월 25일 당일은 태양신 솔 인빅투스의 생일이었다. 로마의 첫 기독교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공식적으로 섬겨오던 태양신의 축젯날을 예수의 생일로 지정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민들이 널리 기념하던 연말 행사들을 점차 기독교 맥락으로 흡수했고,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의 새로운 태양의 신으로 부활하였던 셈이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3.12.18 00:37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몸과 마음은 하나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심한 고열로 응급실에 다녀와서 처음으로 항생제를 먹고 있는, 어느덧 한 살 반이 된 딸아이의 고통을 체험하면서 현대의학의 필연성을 깊이 느꼈다. 우리 인류가 간단한 항생제도 없이 그 많은 세월을 어떻게 견뎌왔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 애잔한 고난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대부분의 인류 세기에서 아동 사망률이 50%나 되는 충격적 사실을 되새기니 고대 그리스에서 탄생한 현대병원의 전신, 아스클레피오스 성전이 떠올랐다. 서양의학의 원산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아폴로의 아들로, 죽은 사람까지 살려내는 실력을 자랑하는 반인반신의 영웅이다. 기원전 5세기 말 의학과 치료의 신으로 승격된다. 이후 그리스 전역에 수많은 아스클레피오스 성전이 세워졌고, 수많은 병자가 그곳에 머무르며 치료를 받았다.   아메리카 편지 아스클레피오스 성역은 단순한 숭배 장소가 아닌, 복잡하고 다채로운 생활과 치유의 공간이었다. 병자를 수용한 건물, 기도와 숭배의 성전, 퍼포먼스와 공연의 극장, 목욕시설, 심신을 단련하는 김나지움 등 각종 편의시설을 갖춘 종합센터였다. 더욱이 남녀노소 모두 부와 권력에 무관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이었고, 그 폭발적인 효과는 수많은 증언에 의해 입증됐다. 특히 신전에서 하룻밤 지내며 꿈을 통해 아스클레피오스 신의 신비로운 기운을 받는 치유방식이 유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종교적 의례에 편파적으로 주목할 이유가 없다. 그 성역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깨끗한 목욕과 마음의 정화를 거쳐 그 당시의 히포크라테스 의학의 기술과 상통하는 전인적인 치료를 받았던 것이다.   이렇듯 현대의학의 근원이 과학과 종교의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몸과 마음의 웰빙이 하나의 개념으로 상통한다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와 더불어 한의학의 지혜도 새로운 시각에서 조망할 필요가 있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3.12.11 00:09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조상 숭배의 보편성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어린 시절을 부모님 유학을 따라 미국에서 보내고 초등 4학년 때 귀국한 나는 우리나라에서 제사 지내는 관습이 무척 신기했다. 할머니께 왜 우리는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기독교인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통해 조상을 만난다”고 말씀하신 게 기억난다. 그 뒤로도 제사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지만 영화나 연속극 등을 보며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조상 숭배 관례는 유교적 차원에서 부모를 섬기는 효의 정신과 함께 체계화했다. 하지만 그 본질은 사후의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에 영향력을 끼친다는 믿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더 나아가 토속적이고 원초적인 신앙에 기원을 두고 있는 동아시아 문명 전반에 뿌리 박고 있는 풍습이다.   아메리카 편지 고대 로마인에게도 우리와 거의 동일한 조상숭배 관습이 있었다. 로마인들은 데스마스크를 떠서 만든 조상들의 초상화 및 조각상을 집안에 놓고, 때때로 조상의 영혼을 추모하는 제례의식을 거행했다. 제물을 바치고 제사상을 차리며 왁스로 만든 조각상을 들고 행렬하기도 했다.(사진) 여행을 떠날 때는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의 조각과 함께하였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조상들의 승인을 받기 위한 기도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적인 종교관습은 주피터·주노·미네르바 등 주요 신들을 섬기는 공적인 종교와 공존했다. 널리 퍼진 조상숭배 관습 덕분에 로마제국의 ‘임페리얼 컬트(imperial cult, 황제숭배)’가 어렵지 않게 국교로 지정됐다고 볼 수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비롯한 거의 모든 로마의 황제들이 사후에 신으로 받들어졌고, 현존하는 황제가 그들을 섬기는 사제 노릇을 했다. 19세기 후반 조선에 온 프랑스 외방선교회 신부들이 제사를 금하여 많은 기독교인이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은, 전통의 보편성을 무시하고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지 못한 데서 생긴 비극이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3.12.04 00:20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표현의 자유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소셜미디어 플랫폼 X(옛 트위터)를 인수한 세계 최고의 부자 일론 머스크가 반(反)유대주의 발언에 동의한 뒤로 애플·IBM·디즈니 등 주요 기업의 광고 중단이 이어지고 있다. 그는 자그마치 55조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트위터를 인수한 이유가 다름 아닌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머스크는 근래 들어 특히 소셜미디어에서 콘텐트 모니터링이 정치적인 이유로 사용된다고 주장하며, 도널드 트럼프 등 그동안 금지됐던 회원들을 복귀시키고 모니터링 부서를 80%나 줄이기도 했다. 그 결과 혐오 표현과 폭력적인 발언, 아동 포르노 등 부정적인 콘텐트가 증가하는 등 부작용이 적지 않아 논란이 됐다.   아메리카 편지 하지만 현대 미디어가 거치고 있는 검열 과정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는 참으로 정의하기 어렵다.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와 근본적으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기원전 6세기 후반 아테네에서 설립된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핵심 사상인 ‘이세고리아(isegoria)’는 모든 시민에게 동등하게 주어진 표현의 권리다. 정치적·경제적·종교적인 소속과 관련 없이 만 30세 이상의 시민은 그리스의 집회인 에클레시아(ekklesia)에서 누구든지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399년 아테네에서 ‘신성모독죄’와 ‘젊은 세대를 타락시켰다’는 빌미로 사형당한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이야기는 이세고리아에 직접적으로 대립된다.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스파르타에 패한 아테네는 30인 과두정권을 겪고 또 내전이 일어나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기도 했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정치 혼란이 언론의 자유를 저지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서 양쪽 진영이 합의할 수 있는 상식적이고도 보편적인 선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3.11.27 00:06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로마의 목욕탕 문화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며칠 전 생일 기념으로 토론토 근처의 유럽 스타일의 대규모 스파에서 한나절을 보냈다. 한국에서 온천과 대중목욕탕에 다니며 자란 덕분에 서양의 ‘스파 문화’에 별다른 호기심 없었는데, 이번에는 무척 신선하고 인상 깊게 다가왔다. 보통 스파라고 하면 피부관리나 마시지 좀 받고 온수탕에서 한동안 몸을 푸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6만㎡ 규모의 이곳은 10개 이상의 가지각색 사우나와 찜질방, 여러 온도의 수영장 및 휴식공간과 모닥불, 고급 레스토랑과 술집을 갖춘 한마디로 어른을 위한 놀이동산이었다. 플로팅 풀에 누워 물속으로 들리는 음악과 함께 무중력 명상을 체험하기도 했다.   아메리카 편지 목욕 문화의 전통은 다양하지만 이런 대규모 형태의 스파 시설은 로마시대의 산물이다. 로마 원로들이 뿌연 찜질방에 앉아 비밀 거래를 논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이들의 목욕 문화는 고도로 발달한 공학기술과 시멘트의 발명으로 생겨난 혁명적인 건축기술 덕분에 만들어졌다.   로마 제국의 상수도 시스템은 물을 멀리서 끌어오는 200여 개의 ‘아퀴덕트(Aqueduct)’로 이루어져 있다. 로마의 절정기에는 이 아퀴덕트를 통해 1200여개의 분수대, 11개의 대규모 공중목욕시설, 수백 개의 작은 목욕탕, 그리고 모의 해전을 벌였던 두 개의 인공호수에 물을 공급했다.   티투스 이후의 로마 황제들은 너도나도 으리으리한 공중목욕탕을 건설해 인심을 사고 권력을 과시했다. 216년 건설된 카라칼라의 욕장은 한 면이 330m가 넘는 거대한 시설이다.(사진) 돔과 아치를 이용한 건축 양식은 20세기 주요 지형지물에 반영되기도 했다. 한 번에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욕장은 단순한 목욕 공간이 아닌, 사교·운동·휴식·사업, 그리고 쾌락의 공간이었다. 스파 문화를 전 세계로 퍼뜨린 로마제국의 영향력이 다시금 감탄스럽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3.11.20 00:32

  • [김승중의 아메리카 편지] 헤타이라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법 아래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고대 그리스 사회의 핵심 사상인 ‘이소노미아(isonomia)’다. 현대 민주주의에서도 지고의 가치로 평가된다. 그런데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 함은 그리스 도시국가의 시민을 뜻한다. 외국인과 노예는 물론 30세 이상의 남자 외의 모든 사람, 즉 어린이와 모든 여성은 제외된다. 그리스 여성들은 다른 가부장제 사회와 비슷하게, 가문의 재산으로 취급되어 철저한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아메리카 편지 신체교육을 각별하게 여긴 고대 그리스였지만, 많은 도시국가 중 오직 스파르타만이 여자아이들도 김나지움에서 홀랑 벗고 하는 육체적 단련을 시켰다. 사춘기를 갓 맞이한 13세에 딸을 시집보내는 관습과 달리, 스파르타에서는 적어도 18세까지 기다렸다가 출가를 시켰다. 물론 이유는 튼튼한 군인을 배출하기 위함이라지만, 아테네의 라이벌인 스파르타에서 여성의 삶이 훨씬 더 자유로웠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토록 극도로 제한적인 제도에 얽매이지 않은 그리스 여인들이 있다. 바로 헤타이라(hetaira)라 불리는, 한마디로 말하면 고대 그리스의 기생이다. 이들은 성매매업을 하는 포르네(porne)와는 달리 고대 그리스의 술자리인 심포지온에서 춤과 풍류 등 가지각색의 엔터테인먼트를 서비스하는 프로페셔널이었다. 수많은 헤타이라가 보통 여성들과는 달리 고등교육을 받아 지적인 활동도 하였고, 사업가로서 금전적인 이익을  챙기기도 했다. 고객들은 헤타이라를 장기간 ‘첩’으로 고용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삶은 개방적이었기에 유명 헤타이라에 관한 사회적 언급도 많이 남아 있다. 소크라테스에게도 가르침을 주었다고 하는 페리클레스의 애첩 아스파시아가 헤타이라 출신이라는 사실도 놀랍지 않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보호를 받는 헤타이라는 현대적인 여성형과 유사한 점이 많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2023.11.13 00:25